['암 치료 꿈 실현' 한발 앞당긴 논문, '셀'誌에 낸 김빛내리 단장]

마이크로RNA 합성 과정 규명
"인재들 모아 '드림팀' 꾸린 덕분, 학생들 의·약系로 떠나 안타까워… 과학자가 자부심 갖는 사회 돼야"

14년 전 서울대 생명과학인력양성사업단에 계약직 연구교수가 있었다. 성과가 변변치 못하면 언제라도 짐을 싸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2억원이나 개인 빚까지 내서 장비를 갖췄다. 자신의 연구에 대한 믿음이 없었다면 버티기 힘든 날들이었다. 이제 그는 논문을 발표할 때마다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한 해 100억원까지 연구비를 쓸 수 있는 세계적 생명과학자로 우뚝 섰다. 한국의 '퀴리 부인'으로 불리는 김빛내리(46) 기초과학연구원(IBS) RNA연구단장 겸 서울대 생명과학부 교수다.

김 단장은 28일 생명과학 분야 최고 학술지인 '셀(Cell)'을 통해 "인체의 모든 생명 현상을 조절하는 핵심 유전 물질인 '마이크로RNA'를 만들어내는 단백질 복합체의 구성과 기능을 알아냈다"고 밝혔다. 원래 RNA(리보핵산)는 유전 물질인 DNA(디옥시리보핵산)의 보조자 정도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다가 1993년 미국에서 일반 RNA보다 훨씬 작은 마이크로RNA가 발견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마이크로RNA가 인체의 DNA 정보로 단백질을 만드는 과정을 조절하는 '세포의 경찰' 역할을 한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 즉각 전 세계 과학자들이 마이크로RNA 연구에 달려들었다. 이후 2000여종의 마이크로RNA가 밝혀졌다.

김 단장은 2002년 마이크로RNA의 생성 과정을 처음 밝혀냈고, 이듬해에는 마이크로RNA를 만드는 공장인 '드로셔 단백질 복합체'도 최초로 발견했다. 그리고 12년 만인 이번에는 드로셔 단백질 복합체를 처음으로 대량 정제해 부위별 기능을 정확히 밝혀냈다. "마이크로RNA가 잘못되면 암이 생깁니다. 그러니 거꾸로 마이크로RNA를 바로잡으면 암을 치료할 수도 있는 것이죠." 이번 연구는 암 치료제를 만들 공장 설계도에 바짝 다가선 것으로 평가된다.

국제과학논문인용색인(SCI)을 만드는 톰슨 사이언티픽은 한국인이 주도하는 7개 연구의 하나로 김 단장의 RNA 연구를 꼽았다. 논문 인용 횟수는 이 중 김 단장이 가장 많다.

김 단장의 IBS RNA연구단에는 연구원이 70여명 있다. 그는 "한 해 100억원까지 받을 수 있지만 현재 40억원 정도 쓰고 있다"며 "더 받으면 감당하기 힘들 것 같다"면서 웃었다. "무엇보다 젊은 연구자들에게 좋은 자리를 마련해줄 수 있어 좋습니다. 그렇게 온 연구자들이 여기서 성과를 내고, 다시 국내외 유명 대학에 교수로 가는 선순환 구조도 만들어졌어요." 김 단장은 "외국보다 인력도 장비도 다 부족하니 마이크로RNA의 합성 과정이라는 핵심 문제 하나만 풀자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는 "이 분야에서는 우리가 최고라고 생각한다"며 "인재를 모아 연구에 최적화된 '드림팀'을 꾸린 덕분"이라고 했다.

김 단장은 2012년 IBS 연구단장이 되면서 우수한 젊은 연구자들을 모았다. 이번 논문의 공동 교신저자인 우재성 박사가 대표적이다. 포스텍 출신인 우 박사는 단백질 정제 전문가이다. 서울대 물리천문학부 홍성철 교수는 단일 분자 수준에서 단백질의 움직임을 관찰해 그 기능을 밝혀냈다. 베트남 하노이과학대를 나와 KAIST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응우옌 박사는 기존에 발견된 사실들을 아우르는 일반 모델을 만들었다. 김 단장은 "무엇보다 학문적 문제에만 장기간 집중할 수 있는 정신적 자유가 큰 힘이 됐다"고 했다.

하지만 대학에서 학생들을 보면 걱정이 앞선다고 한다. 생명과학자가 되겠다고 입학한 학생들이 "미래가 불안하다"면서 의·약학 계열로 바꾸는 경우를 자주 보기 때문이다. "학위 받고 일자리 얻기까지 시간이 걸려서 그렇지, 직장 잡기가 다른 곳보다 어려운 건 아닙니다. 사회 분위기가 과학자로서 자부심을 갖지 못하게 하는 점이 문제지요. 이제 우리도 과학 연구로 인류에 기여하는 나라가 돼야 합니다. 우리가 그 길을 먼저 보여주면 학생들도 따라오겠죠."

김 단장은 "IBS 연구단장으로서 가장 보람 있던 일은 젊은 과학자들이 연구비 걱정 없이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준 것"이라고 했다. 그 자신이 한창 연구할 나이에 자리를 잡지 못해 고생했기 때문이다.

김빛내리 단장은 전남 영암 출신으로 서울 상명여대 사대부고, 서울대 미생물학과를 졸업했다. 고교 시절 우연히 과학사 책을 읽고 자연과학의 매력에 빠져들었다고 한다. 석사과정을 마치고 영국 옥스퍼드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 펜실베이니아대에서 박사후연구원 생활을 하고, 2001년 서울대 연구교수로 왔다.

남들이 보기엔 성공의 고속도로를 달린 것처럼 보이지만 여성의 한계에 좌절한 경험도 있다. 큰애를 갖고 1년 반 동안 주부로 지내면서 연구를 포기할 생각도 했었다고 한다. 하지만 검사인 남편이 '당신의 연구는 굉장히 중요하니 꼭 계속하라'고 격려해 복귀할 힘을 얻었다고 한다. 현재 딸과 아들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