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돈규 기자의 2사만루] 파리오페라발레단 제1무용수…'콩쿠르의 여왕' 박세은

"이젠 주역만 맡아요"
세계 4大 발레 콩쿠르 3개 대회 정상 밟아
群舞에서부터 시작… 작년 '제 1무용수' 승급

"완벽주의자로 살았는데 이젠 관대해지고 싶어
집착을 내려놓으니 춤이 자유로워져"

"연습하다 얼굴 6㎝ 찢어져… 엄마가 나보다 더 아팠겠죠"

두려움과 싸우다
'백조의 호수' 주역 대타 4일간 안무 익힌 뒤
불안해 밤새 잠 못자고 무대에 오른 적도

시험과는 작별
최고 무용수 '에투알' 감독과 이사회가 뽑아
선배 무용수 말대로 이젠 하루하루가 시험

베스트 파트너 만들려면
상대방의 다른 점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이해
처음엔 호흡 안맞아도 연습 후 무대 서면 '완벽'

발레에는 '카스트 제도'가 남아 있다. 철저한 계급사회다. 크게 세 덩어리로 나누면 발레단의 '등뼈'라 불리는 코르 드 발레(corps de ballet·군무진)가 최하층을 받치고 그 위로 솔리스트와 수석 무용수가 있다. 강수진 전 독일 슈투트가르트발레단 수석(현재 국립발레단장)을 비롯해 누구나 거의 예외 없이 군무(群舞)로 출발한다. 남녀 주인공 뒤에서 배경이 되며 여럿이 한 몸처럼 춤추는 역할이다.

박세은(28)은 미국 아메리칸발레시어터(ABT), 한국 국립발레단에 이어 프랑스 파리오페라발레단에서 활약하며 밑바닥을 체험했다. 주역에서 군무로 '신분 추락'도 겪었다. 1669년 창단한 파리오페라발레단은 세계 최고(最古)이자 최고(最高)로 통한다. 발레 무용수 최고의 영예인 '브누아 드 라 당스(Benois de la Danse)' 수상자만 16명을 배출했다. 박세은은 외국인이 5%에 불과하고 경쟁도 심한 이 발레단에 2011년 한국 발레리나 최초로 입단해 지난해 말 프르미에 당쇠르(premier danseur· 제1 무용수)로 승급했다. 올해부턴 주역으로만 춤추고 있다.

"지난해 11월 승급 시험(1년에 한 번 있다) 치른 날 오후에 가락국수를 먹으러 나갔어요. 루브르 박물관 근처를 걷다 이메일을 확인하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눈물이 왈칵 쏟아졌어요. 승급했다는 소식을 전하려고 집에 전화했더니 엄마가 '세은아~' 하면서 이미 울고 계셨습니다. 시험 결과를 트위터로도 공지했는데 그 밤에 보신 거예요."

긴 하루였다. 저녁에는 조지 발란신이 안무한 '브람스―쇤베르크 사중주' 주역을 맡아 무대에 올랐다. 시즌이 끝나고 귀국해 지난 9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만난 박세은은 "승급 시험에서 또 미끄러지면 춤추면서 참 슬프겠구나 걱정했는데, 그날은 아주 날아다녔다"고 했다.

'콩쿠르의 여왕', 시험이여 안녕

박세은은 2006년 미국 잭슨발레콩쿠르에서 금상 수상자 없는 은상을 받았다. 이듬해 스위스 로잔콩쿠르에선 1위를 차지했다. 22년 전 강수진이 입상하며 이름을 알린 대회다. 박세은은 2010년 불가리아 바르나콩쿠르에서 금상을 받으며 한국 무용수 최초로 세계 4대 발레콩쿠르(바르나·잭슨·모스크바·로잔) 중 세 봉우리를 정복했다.

―파리오페라발레단의 체계가 궁금합니다.

"무용수는 모두 153명이고 5단계로 구분해요. 군무인 카드리유(quadrille)가 45명, 군무 리더인 코리페(coryphée)가 34명, 솔리스트를 겸하는 쉬제(sujet)가 41명, 프르미에 당쇠르가 14명, 그리고 에투알(étoile·'별'이라는 뜻) 19명입니다. 은퇴 등으로 에투알 자리가 비면 프르미에 당쇠르에서 뽑아 올리고요."

―승급한 뒤 뭐가 달라졌나요?

"우선 어떤 작품이든 주역만 맡아요. 그 전에 쉬제로 있을 때는 제가 언제 어떤 배역으로 나올지 가늠할 수 없었어요. 주역이 펑크를 내면 갑자기 그 자리에 투입될 수도 있으니까요.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힘겨웠어요. 프르미에 당쇠르가 되니 주인공이 일찌감치 공지되고 저를 보러 오는 관객도 생겨 책임감이 커졌습니다."

―쉬제는 한 공연에서 군무와 솔리스트를 겸하기도 하나요?

"가령 '백조의 호수'라면 1막에서 파 드 트루아(pas de trois·3인무)를, 2~4막에서는 군무를 추는 식이죠. 하루 6시간 리허설을 하면 군무를 연습하다 시간 쪼개 주역의 춤도 익혀야 하고, 빼먹은 군무를 스스로 따라잡아야 해 피곤하고 정신없었죠."

―승급으로 배역이나 대우가 달라진 것 말고 또 기쁜 일이 있다면.

"월급은 300유로(약 40만원)쯤 올랐어요. 그보다는 다른 무용수의 춤을 객석에서 볼 수 있어 좋아요. 전에는 제가 맡은 춤을 추고 무대 뒤로 들어가 숨을 고르면서 곁눈질하는 정도였습니다. 이제 시간적 여유도 생겨서 필요한 공부도 하고 클래식·영화·미술 등 인접한 예술도 충분히 감상할 수 있으니 삶의 질이 달라졌어요."

―이제 에투알 될 일만 남았네요. 외신들이 전하듯이 시간문제겠죠?

"에투알이었다가 은퇴한 아네스 르테스튀(2007 브누아 드 라 당스 수상)가 승급 축하한다며 뼈있는 한 마디를 던졌어요. '이제 날마다 시험이네'라고. 정신이 번쩍 들었죠."

―끝인 줄 알았는데 끝이 아니다?

"에투알은 예술감독과 이사회가 논의해서 정해요. 아네스의 말은 더 이상 승급 시험은 없지만 이제부턴 매 순간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뜻이었어요. 발레리나로 사는 건 좋을 때보다 힘들 때가 더 많고, 경쟁에서 살아남으려면 결국은 인내뿐인 것 같아요. 때를 기다리며 나를 단련시켜야죠."

―한동안 '콩쿠르의 여왕'으로 불렸는데 시험에서 벗어난 걸 일단 축하합니다.

"승급 시험도 일종의 콩쿠르죠. 예원학교 2학년 때 첫 출전부터 15년 동안 저를 늘 시험대 위에 올려놓고 살았어요. 시험이여 안녕(웃음)."

누군가 나를 주목한다는 것

발레리나 가방에는 십중팔구 토슈즈(toe shoes)가 있다. 무게는 250~300g. 중력에 저항하며 날아오르려면 가벼울수록 좋다. 10년 전 박세은이 ABT에서 춤출 때 가방엔 토슈즈와 레오타드(연습복), 수선용 실·바늘, 도시락과 전자사전이 들어 있었다.

―요즘 출근할 땐 가방에 뭘 챙기나요.

"발레단이 제2의 집 같아요. 세탁기·냉장고도 있고 가끔 낮잠도 자요. 발레슈즈를 꿰매는 일도 발레단에서 해결합니다. 가방엔 지갑과 스마트폰, 우산과 선글라스와 간단한 화장품만 들어 있어요."

―발레는 어떻게 시작했나요?

"초등학교 3학년 때 아빠 친구 딸이 국립발레단 '호두까기 인형'에 출연한다고 해서 보러 갔어요. 저걸 하면 당시 여주인공을 맡은 김지영(국립발레단 수석) 언니처럼 예쁜 의상을 입을 수 있겠구나 싶었죠. 초등학교 땐 발레의 '발'자도 몰랐어요. 초급반에서 중급반으로 올라갈 때 저만 유급했답니다."

―어떤 변곡점이 있었군요.

"예원학교 1학년 축제 때 부장 선생님이 15초짜리 솔로(독무)를 주신 거예요. 늘 뒤쪽에 맹하게 서 있던 아이였는데 그때 누군가 저를 주목하고 있다는 걸 알았어요. 나와서 돌고 들어가면 되는 춤이었습니다. 나를 좋아하시나보다, 키워주려나보다 착각했죠(웃음). 여하튼 더 잘하고 싶어지면서 발레의 매력에 빠졌고 큰 동력이 됐어요. 난생처음으로 진지해졌죠."

―인정받고 싶은 욕망을 툭 건드려주셨군요.

"주역을 따낸 기분이었죠(웃음). 제가 거의 꼴찌로 입학했는데 중학교 2학년부터 발레 실력이 수직 상승해 결국 수석으로 졸업했어요. 좀 웃기지만 2등이 편하더라고요. 1등은 불안해요. 더 올라갈 데가 없으니까."

―몇 해 전 군무진으로 있을 때 '이제 올라갈 일만 남았잖아요' 했던 말이 떠오르네요.

"제가 파리오페라발레단을 좋아하는 까닭도 밑바닥부터 한 계단씩 밟고 올라갈 수 있어서 그런 것 같아요."

―'빡세'라는 별명은 이름에서 나온 것 같은데 누구 작품이죠?

"중학교 2학년 때 김기완(국립발레단)이나 김윤식(체코국립발레단)이 지었을 거예요. 제가 세상 물정 잘 모르고 백치미가 있었나봐요. 발레밖에 모르는 돌직구라서 놀림을 받았지요."

―파리오페라발레단 동료는 박세은의 강점으로 뭘 첫손가락에 꼽나요.

"점프요. 무대가 15도쯤 경사져 있는데, 발레리노(남자)만큼 높이 뛴대요. 발레단에서 저만큼 높이 점프하고 체공 시간이 긴 발레리나는 없는 것 같아요."

―신체 조건이 좋은 편이죠?

"비율은 좋았대요. 마르고 머리 작고 팔다리 길고."

발레리나는 자신에 대해 점수가 박하다. 가진 것보다 결핍이 더 커 보이기 때문일 것이다. 지도자들은 박세은을 "축(軸)이 좋아 회전 동작이 정확하고 선이 깨끗하다"(예원학교 김나영 교사) "신체의 아름다운 비율, '끼'에다 기술까지 두루 갖춘 무용수"(한국예술종합학교 김선희 교수)라고 평한다.

최악은 2015년, 상처가 영광으로

삶은 소 잔등처럼 부드럽게 흘러가지 않는다. "발레를 하는 동안 슬럼프라곤 없었다"는 그녀에겐 2015년이 최악의 해였다. 그해 9월 부츠를 신고 추는 모던 발레를 연습하다 앞에 있던 무용수의 신발 굽이 이마를 강타했다.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피가 뚝뚝 떨어졌고 급히 병원으로 실려갔다.

―얼마나 찢어졌나요?

"세로로 6㎝요. 눈이 찢어졌으면 답이 없었대요(웃음). 눈 안 다치고 코뼈도 안 다쳐 의사 선생님이 '아주 운이 좋은 케이스'라고 했어요."

―병원에서 무슨 생각을 했나요.

"내가 잘 살아갈 수 있을까 하는 근본적인 걱정을 한 시기예요. 무용수에게 중요한 안면이 찢어져 우울증에 빠졌습니다."

―그해 승급 시험에서도 탈락했는데 어떻게 이겨냈나요?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쉬지도 않고 바로 공연했어요. 그래야 트라우마가 안 남을 것 같았습니다. 이제 익숙해져서 흉터를 의식하지 않아요. 승급하면서 포상을 받은 느낌도 들었지요."

―부모님도 걱정이 많았겠네요.

"엄마는 저보다 더 심하게 우울증이 온 것 같아요. 언니 말 들어보면 이 닦다가 울고 요리하다가도 울고 그러셨대요."

―가족과 떨어져 살면서 아프면 더 외로워졌을 텐데 어떻게 견뎠나요?

"프랑스어가 익숙하지 않아 우리말 하고 싶고 친구들과 맛있는 집에도 가고 싶었죠. 함께 어울려 다녔어요. 말 그대로 노력이죠. 그래서 더 외로웠어요."

―전화로 엄마한테 투정도 부리나요?

"엄마는 '인생은 마라톤이니 천천히 가도 된다'고 하세요. 힘들다고 하면 '들어올래 그냥?'(웃음). 그럼 전 '아냐, 조금만 더 해보고' 하죠."

―무대에 나가기 전에 의심이 치밀고 올라올 때도 있지 않았나요?

"불안해서 흔들린 적이 딱 한 번 있었어요. 2014년 '백조의 호수' 주역을 맡았을 땝니다. 예술감독이 저를 러시아 마린스키발레단에서 올리는 '라 바야데르' 주역으로 보냈어요. '백조의 호수' 연습은 다녀와서 할 수 있겠다 싶었죠."

―그런데요?

"주역을 맡은 에투알이 다쳐서 갑자기 호출을 받았어요. 공연 날까지 나흘 안에 익혀야 했지요. 제가 1~3막은 외우는데 4막은 아예 몰랐던 때입니다. 비행기 타고 러시아에서 돌아오자마자 연습복으로 갈아입었죠. 게다가 파트너가 손만 잡아도 민폐일 것 같은 에투알, 마치아스 에이만(2012 브누아 드 라 당스 수상)이었어요."

―떨렸겠군요. 에투알은 역시 다르던가요?

"고마웠어요. '다 맞춰줄 테니 걱정하지 말고 불편하면 알려달라' 하더군요. 에투알은 테크닉(기술)이나 힘이 좋은 건 아니고 호흡이 다릅니다. 파트너의 중심을 잘 기억하고 함께 간다는 느낌을 확실히 받아요."

박세은은 공연 전날 밤에 잠을 설쳤다. "새벽 5시까지 차이콥스키 음악이 귀에서 안 나갔다"고 했다. 딴 따라라라 따라라…. 평생 처음 있는 일이었다. 다음 날 공연장에 가 그런 일이 있었다고 하자 누군가 이렇게 답했다. "내 최고의 공연은 밤을 새우고 올라간 무대야."

"겁나고 두렵지만 맞서 싸워야죠"

파리오페라발레단은 레퍼토리가 수백 가지다. '백조의 호수'는 5년, '돈키호테'는 4년 만에 공연할 정도다. 박세은은 "위대한 안무가 루돌프 누레예프와 더불어 레퍼토리는 우리 발레단의 가장 큰 자산"이라고 했다. 발레에는 세 종류의 파트너가 있다. '그냥 파트너' 'OK 파트너' '베스트 파트너'. 그녀는 "내가 베스트 파트너가 되려고 애쓰면 나도 베스트를 만날 확률이 높다"고 했다.

―파트너 운이 좋았나요?

"저는 '그냥 파트너' 'OK 파트너'와 춤을 춘 기억이 별로 없어요. 처음에는 호흡이 잘 안 맞더라도 연습하고 나서 무대에 서면 늘 '베스트 파트너'가 돼 있더라고요. 한 가지 팁이 있어요."

―뭐죠?

"상대방이 다른 점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거죠. 제가 작품을 할 땐 그를 이런 눈으로 쳐다보고 싶은데 그도 이런 눈빛으로 받아쳐줬으면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말을 할 수도 없는 요청인데 척척 맞는 파트너가 있어요."

―무대에 오를 땐 어떤 습관이 있나요?

"기도를 해요. 지금 이 순간에 감사하고 마음껏 즐길 수 있게 해달라고."

―가장 좋아하는 발레는 뭔가요?

"드라마 발레 '오네긴'요. 음악 때문인 것 같아요. 남자가 등장하는 음악과 퇴장하는 타이밍까지 다 알아요. 외로울 땐 제가 좋아하는 작품을 봐요. 그럼 너무 행복해요. 공연이 있으면 네덜란드든 영국이든 가서 봅니다. 그럼 채워져요. 공연 보는 게 제일 큰 행복이에요. 언젠가 나만의 방식대로 '오네긴' 여주인공 타티야나를 표현하고 싶어요."

―어릴 적부터 음감이 좋았나요?

"엄마가 집에서 피아노 교습을 했어요. 연주 소리가 늘 차올랐죠. 아빠는 항상 아침에 클래식 음악을 틀어놓았어요. 그걸 들으며 잠에서 깨고 밥을 먹었죠. 음악이 항상 제 삶에 들어와 있었어요."

―박세은의 강점은 점프가 아니라 다른 데 있었군요.

"음악성이 굉장히 중요해요. 음악을 분배해서 정확한 타이밍에 몸으로 표현하는 능력이 테크닉보다는 값진 것 같아요."

―로잔콩쿠르 그랑프리를 받은 지 10년이네요. 10년 뒤엔 어떨 것 같은지.

"은퇴(파리오페라발레단은 42세)를 몇 년 앞두고 있겠네요. 저도 제가 궁금합니다."

―또 다른 목표가 생겼나요?

"제 꿈은 에투알이 아녜요. 정말 좋은 작품을 많이 만나 헤어나지 못할 만큼의 열정으로 사는 거예요. 겁도 나고 두렵지만 맞서 싸워야죠."

열일곱 살 때 한국예술종합학교에 영재로 입학해 졸업한 박세은은 일요일에 등교해 연습하면서 친구들과 짜장면 시켜 먹던 시절을 그리워한다. "교문 닫는 시간까지 연습하다 쫓겨나던 자정 무렵의 공기도 생생하다"고 했다. 오늘과 내일의 박세은에게 해주고 싶은 말을 물었다. "완벽주의자처럼 살았는데 이제 너한테 관대해졌으면 좋겠다. 집착을 내려놓으면서 편안해지고 춤이 자유로워졌으니. 좀 부족해도 인간이니까 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