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ose-up]
다이아몬드부터 신약까지 만들어냈다… 대한민국 원조 벤처기업가, 일진그룹 회장 허진규

- 부품 만들던 손, 바이오에 도전
52년前 30만원 들고 창업, 최초·최고 부품만 400개 넘어
난치병 루푸스 치료제 개발, FDA 허가 앞둬… 내년 美 시판

- 박정희의 한마디, 그를 움직였다
총포와 탄약 국산화 지시받고 서울대 공대 친구들과 전국 뒤져
어엿한 공장 하나 없는 현실에 유학 준비 때려치우고 창업 나서

- 엔지니어가 애국자
기계는 사고 돈은 빌리면 되지만 인재는 키워낼 수밖에 없어
수천번 실패가 결국 성공 만들어

"어이, 어디 한번 해보자고."

부품·소재 전문 기업 일진그룹의 허진규(80) 회장이 평소 직원들에게 하는 말이다. 그는 1968년 1월 전 재산 30만원을 들고 일진을 창업해 국내외 44개 계열사를 거느린 매출 2조5000억원의 국내 대표 소재·부품 기업으로 키웠다. PCB(인쇄회로기판)와 2차전지 핵심 소재인 일렉포일(Elecfoil·동박), 공업용 다이아몬드, 수소 연료 탱크까지 일진이 개발해 국내 '최초' '최고' 타이틀이 붙은 소재·부품은 400개가 넘는다.

일진은 지난해 일본의 대한(對韓) 소재·부품 수출 규제로 다시 주목받았다. 50년 넘게 소재·부품 산업을 키워온 허진규 회장과 지난 4일 서울 마포 집무실에서 만나 성공 비결을 물었다. 14년 만의 언론 인터뷰다. 그는 "수천 번 실패를 거듭하고, 개발까지 20년 넘게 걸릴 수도 있는 게 소재·부품 분야"라며 "일본의 수출 제재로 소재·부품 중요성을 많이 알게 된 계기가 됐고, 우리 대기업도 일본에서 수입해 쓰면 된다는 생각을 좀 바꿨으면 한다"고 충고했다. 올해 여든인 허 회장은 "하고 싶은 것이 많고, 머릿속에 많이 들었다. 나는 아직 목이 마르다"고 했다.

◇"수천 번 실패…20년 걸리기도"

▲ 조선총독부 첨탑 자른 일진의 기술 - 1995년 8월 일제 잔재 청산을 위해 진행된 구(舊) 조선총독부 건물 첨탑 절단 작업에 일진이 개발한 공업용 다이아몬드 줄톱이 사용됐다. 당시 이를 보도한 조선일보 1면 기사.

허 회장은 서울대 금속공학과를 졸업했다. 군대를 제대하고 들어간 회사는 1년 8개월 만에 부도가 났다. 그는 공장장으로부터 주물 설계도면을 얻었다. 전 재산과 빌린 돈을 합친 30만원으로 100㎏짜리 흑연 도가니(쇠붙이를 녹이는 그릇)를 샀다. 그리고 나서 스물여덟이던 1968년 서울 노량진 실개천 인근 낡은 주택의 10평 남짓한 마당에 일진그룹의 모태가 된 일진금속공업사(현 일진전기)를 세웠다. 종업원은 2명이었다.

-'원조 벤처 기업인'으로 불린다.

"ROTC(학군장교) 1기다. 총포·탄약·차량을 개발하는 육군본부 병기감실에 배치받았다. 박정희 대통령이 신임 장교를 차출해 총포와 탄약 국산화 지시를 내렸다. 서울대 공대 출신 5명이 전국을 돌아다녔는데 공장 같은 공장이 하나도 없더라. 남들은 다 유학 준비했는데 난 '외국(유학) 집어치우고 산업 발전시키는 게 낫겠다' 싶어 창업했다."

-소재·부품 성공 신화를 썼다.

"일진은 성공보다 실패를 바탕으로 큰 기업이다. 2006년 초소형 프로젝션용 LCD 패널을 만들었는데 타이밍이 맞지 않았다. 1000억원 넘게 날렸다. 한 번에 성공하는 기술은 없다. 일렉포일은 수천 번 실패를 거듭했고 만족할 만한 기술에 도달하는 데 20년 걸렸다. 필요한 기술이면 반드시 우리 힘으로 개발해야 한다는 마음으로 도전한 것이다."

-어려움도 있었을 텐데.

"기업인이 힘들지 않은 순간이 어디 있겠나. 돌이켜보면 공업용 다이아몬드 영업비밀 침해 소송과 관련해 GE와 싸울 때가 가장 힘들었다. 이제는 자신 있다. 뭐든 무섭지가 않다."

일진이 공업용 다이아몬드 개발·양산에 나서자 1990년대 초 글로벌 시장을 독점해오던 GE가 미국에서 소송을 제기했다. 일진은 1심 패소 판결을 뒤집고 5년 만에 승소했다. 업계에서는 다윗이 골리앗을 이겼다고 했다.

◇"바이오에서 미래 찾을 것"

허 회장은 2010년 캐나다 신약 개발회사 오리니아(Aurinia)에 투자했다. 주변 만류가 심했다. 하지만 그의 '무모한 도전'은 10년 만에 결실을 앞두고 있다. 오리니아가 개발한 난치병 루푸스(Lupus) 신염 치료제가 올 하반기 미국 FDA(식품의약국) 신약 허가 신청 절차에 들어가고, 내년 미국에서 시판될 예정이다. 오리니아는 미국 나스닥과 캐나다 토론토 증시에 상장돼 있고, 일진이 1대 주주이다. 이혁준 신사업팀 상무는 "내년 루푸스 신염 신약이 시판되면 미국에서만 한 해 15억~20억달러 매출을 기대한다"고 말했다.

-소재·부품 회사인 일진의 바이오 투자가 낯선데.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해외 신약 개발 투자는 우리나라에서 내가 최초다. 1990년 20대 젊은 하버드대 교수가 뼈 재생 사업을 하고 싶다고 찾아왔다. 120억원을 투자해 미국 보스턴의 바이오벤처 ETEX를 인수했고, 10년 만에 10배 수익을 냈다. 2018년 회사 창립 50주년 때 미래 성장 산업으로 선언한 분야도 바이오다."

-소재·부품과 바이오는 분야가 다르다.

"바이오는 성공 확률이 굉장히 낮다. 내가 보기에 1~2%밖에 안 된다. 긴 호흡이 필요하다. 그런 면에서 부품·소재 개발과 일맥상통한다."

◇"기술 전쟁 최전선, 엔지니어가 애국자"

-신년사에서 올해 한국 경제를 '오리무중'이라고 했는데.

"국가적으로 똘똘 뭉쳐서 (위기 극복을) 해야 한다. 근데 우리 근로자들은 자기주장이 강하다. 세계는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발전하는데 우린 너무 느리다. 우리가 고속 성장 할 때는 두려움이 없었는데 지금은 좀 겁이 난다."

-공학자·엔지니어 출신 경영자다.

"옛날에는 목숨 바쳐 나라를 지키는 게 애국이었다면, 21세기에는 기술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 연구개발에 몰두하는 엔지니어들이 애국자다. 돈은 빌리면 되고 기계는 사면 되지만, 인재는 정말 잘 키워야 한다."

-직원에게 평소 '악착같이 실패하라'고 강조하는데.

"실패를 해야 성공한다. 가장 좋은 건 성공하는 사람이다. 실패하는 사람이 그다음이다. 제일 나쁜 사람은 도전조차 안 하는 사람이다."

허 회장은 "우리가 가장 잘해 왔고, 또 잘할 수 있는 분야의 기업이 시장에 나오면 과감하게 인수·합병(M&A)도 하겠다"고 말했다. 그는 마지막으로 "공학도 출신 허진규라는 한 기업가가 있었고, 공학 기술을 바탕으로 이 세상에 꼭 필요한 일을 많이 한 좋은 엔지니어 출신 기업가로 기억되는 게 작은 바람"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