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金과銀차이 - 기보배가 쏜 슛 오프 화살(위). 9점 라인에 가까운 8점이다. 로만(멕시코)의 마지막 화살은 기보배의 화살보다 중앙에서 2㎝쯤 더 떨어져 있다. /KBS TV

한국 첫 2관왕… 女 양궁 베이징서 놓친 개인전 타이틀, 막내가 찾아왔다
운명의 슛오프 - 마지막 한 발로 승부 결정, 상대와 똑같이 8점 쐈지만 과녁 중심에 더 가까워 승리
개인·단체 2관왕은 역대 여섯번째 기록

한국의 기보배(24·광주광역시청)와 멕시코의 아이다 로만의 런던올림픽 양궁 개인전 결승이 벌어진 2일(현지 시각) 영국 런던의 로즈 크리켓 그라운드. 마지막 5세트까지 점수는 5-5. 한 발씩 쏴서 과녁 한가운데에 가깝게 쏘는 사람이 이기는 슛오프가 곧바로 이어졌다.

한국엔 행운이었다. 기보배가 쏜 화살은 과녁 위쪽 8점에 맞았다. 9점에서 약간 벗어났다. 한국 응원단 사이에서 탄식이 흘렀다. 결승 상대인 멕시코의 아이다 로만이 9점 이상을 쏘면 곧 기보배가 패하는 상황이었다.

정적 속에 로만이 쏜 마지막 화살이 시위를 떠났다. '퍽' 소리와 함께 중앙에서 왼쪽 10시 방향 8점짜리 과녁에 화살이 꽂혔다. 자포자기한 듯 힘없이 대형 스크린을 쳐다보던 기보배가 환호성을 질렀다. 자신이 쏜 8점짜리보다 2㎝쯤 먼 곳에 화살이 꽂혀 있었다. 기보배의 금메달이었다. 옆에서 경기를 지켜본 미국 기자는 "때론 실력보다 행운이 중요할 때도 있다"며 "한국의 금메달을 축하한다"고 했다.

기보배가 양궁 여자 개인전 결승에서 슛오프 끝에 로만을 6대5로 누르고 단체전에 이어 2관왕에 올랐다. 기보배는 이로써 김수녕(1988년 서울), 조윤정(1992년 바르셀로나), 김경욱(1996년 애틀랜타), 윤미진(2000년 시드니), 박성현(2004년 아테네)에 이어 개인·단체를 모두 석권하며 '여자 신궁(神弓)'의 반열에 섰다. 2008년 베이징올림픽에서 중국에 내줬던 개인전 타이틀도 되찾았다.

기보배는 한국 여자 양궁의 보배였다. 이날 개인전은 세계랭킹 1위인 인도의 쿠마리가 일찌감치 탈락하는 등 상위 시드 선수가 하위권 선수에게 덜미를 잡히는 이변이 속출했다. 한국 선수들도 이변을 피해가지 못했다. 2번 시드였던 이성진이 8강전에서 멕시코의 아비티아에게 2대6으로 졌다. 첫 두 세트를 나눠 가진 이성진은 3세트에서 10점 두 발을 쏘고도 세 발 모두 10점 과녁에 꽂아 넣은 아비티아에게 세트를 내줬다. 이성진은 4세트에서도 28점으로 괜찮은 점수를 뽑아냈으나 아비티아가 29점을 꽂는 바람에 허무하게 패했다. 또 중국과 1점 차로 피 마르는 접전을 펼쳤던 여자 단체 결승에서 10점 네 발을 쏘며 최고 수훈을 세운 최현주(28·창원시청)는 16강전에서 베렝거 슈(프랑스)와 슛오프까지 가는 접전 끝에 5대6으로 아쉽게 패했다.

남은 선수는 팀 막내 기보배였다. 백웅기 여자대표팀 감독은 기보배에 대해 "사대(射臺)에 서면 이상하게 자신감이 사라지곤 하는 게 단점"이라고 했다. 자기 자신에 대한 확신이 부족하다는 것이었다.

기보배의 금빛 여정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8강전에서 상대한 러시아 페로바, 4강전에서 맞붙은 카투나 로릭은 상승세를 타면서 기보배의 아성을 무너뜨리려 했다. 하지만 기보배는 이들을 상대로 필요할 땐 9점, 10점에 화살을 꽂으며 승기를 잡았다.

결승 상대인 멕시코의 아이다 로만도 만만치 않았다. 1세트에서 승기를 잡고도 6점짜리 화살을 쏘는 바람에 기보배에게 2점을 먼저 내줬던 로만은 2세트를 비겼고, 3세트에서 10점 2발, 9점 1발을 쏘며 세트를 따내 3-3 동점을 만들었다. 기보배는 4세트 세 발을 모두 10점에 명중시켜 다시 5-3으로 앞섰다. 마지막 5세트. 로만이 9점 세 방을 쏜 상태에서 이미 18점을 기록한 기보배의 세 번째 화살이 8점이 됐다. 한국 선수들이 좀처럼 쏘지 않은 '실수발'이었다. 오히려 세트를 내주면서 5-5 동점. 흔들린 기보배는 슛오프에서 8점짜리를 쐈지만, 마찬가지로 집중력이 흔들린 로만의 화살보다는 중앙 쪽으로 2㎝ 정도 가까웠다.

한국은 국가대표 선수들이 처음 양궁에 참가한 1984년 LA올림픽부터 2004년 아테네올림픽까지 6연속 금메달을 거머쥐었다. 하지만 2008년 베이징올림픽 때 박성현(현 전북도청 감독)이 중국의 장쥐안쥐안에게 109대110으로 패하면서 7연패(連覇) 꿈이 깨졌다. 단체전이 신설된 1988년 서울올림픽부터 이어진 5연속 개인·단체 동시 석권 행진에도 제동이 걸렸었다. 세트제와 토너먼트제 도입으로 이변 가능성이 커진 데다 다른 나라 선수들의 기량이 급상승하면서 이번 올림픽에서 '세계 최강'의 자리를 지키지 못할 것이란 예상도 있었다. 하지만 이번 대회에서 여자는 여전히 최강의 자리를 지킬 수 있게 됐다. 한국인 지도자인 이웅 감독이 이끄는 멕시코는 이성진을 잡았던 아비티아가 미국의 로릭을 6대2로 누르고 은·동메달을 품에 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