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학PD 분당서 숨진채 발견]

가족에게 "미안하다" 유서, 현장엔 타다 남은 번개탄
'여명의 눈동자' 등 연속 히트, 스타PD·PD CEO 시대 열어… 최고 시청률 64.5% 대기록도
작년 연출作 출연료 밀리는 등 최근엔 경제적인 문제로 苦戰

'여명의 눈동자' '모래시계' 등을 연출한 '스타 PD' 김종학(62)씨가 23일 오전 경기도 분당의 한 고시텔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하루 1만5000원짜리 3평(9.9㎡) 방이었다. 현장엔 타다 남은 번개탄이 있었고 '미안하다'며 가족에게 쓴 A4용지 4장 분량의 유서가 발견됐다. 경찰은 김씨가 자살한 것으로 추정하고 정확한 사인을 조사하고 있다. 그러나 유족의 뜻에 따라 부검은 하지 않기로 했다.

김종학 PD는 방송계에 '스타 PD' 'PD CEO' 시대를 본격적으로 연 인물이다. 1977년 MBC PD로 입사한 그는 신예 박상원을 스타로 만든 '인간시장'(1988년), 첩보 드라마의 고전으로 손꼽히는 '제5열'(1989년) 등을 히트시켰고, 1991년 송지나 작가와 콤비로 만든 38부작 대하극 '여명의 눈동자'로 '스타 연출가'로 우뚝 섰다. '여명의 눈동자'는 영화 못지않은 화려한 스케일로 '블록버스터 드라마' 시대의 서막을 열었고, 이 작품의 성공을 동력으로 그는 이듬해 프리랜서로 독립했다.

김 PD는 독립 후 '귀가 시계'로 불린 SBS '모래시계'(1995년)를 만들어냈다. 평균 시청률 45.3%, 최고 시청률 64.5%를 기록한 '모래시계' 덕분에 SBS는 개국 4년 만에 KBS·MBC의 시청률 양강 구도를 깨는 데 성공했다는 평가도 나온다.

그는 1998년 자신의 이름을 딴 '김종학프로덕션'을 설립하며 제작자로도 본격적으로 나섰다. '김종학프로덕션'은 '아름다운 날들'(2001), '풀하우스'(2004), '하얀 거탑' '태왕사신기'(이상 2007), '베토벤 바이러스'(2008), '추적자'(2012), '너의 목소리가 들려'(방영 중) 등 대작·히트작들을 제작하며 메이저 제작사로 확고히 지위를 굳혀 왔다. 하지만 그의 행로가 순탄치만은 않았다.

김 PD의 작품들은 대부분 광대한 스케일과 CG 등 특수 효과를 많이 사용하는 만큼 다른 드라마보다 제작비가 많이 들어 자금난이 가중됐다고 방송가 관계자들은 말했다. 특히 400억원대의 제작비가 든 '태왕사신기'가 자금난 악화의 계기가 됐다고 보는 시각이 많다. 이 드라마는 국내에서는 30%대의 시청률로 선전했지만, 기대했던 일본 수출 실적이 기대치를 밑돌면서 큰 손실을 입은 것으로 전해졌다.

김 PD는 2009년 대표이사직에서 물러나며 지분을 정리했지만 경제문제는 이어졌다. 특히 지난해 그가 연출한 SBS 드라마 '신의'는 배우들의 출연료 6억4000만원이 밀렸으며, 김 PD는 투자자들로부터 고소당해 피의자 신분으로 검찰 수사를 받다 지난 17일 사전구속영장이 청구됐었다. 그러나 그는 영장실질심사가 예정됐던 19일에 법원에 출석하지 않았고, 23일 다시 검찰 조사를 받을 예정이었다.

김 PD는 영화 제작 건으로 중국 출장을 가려다 자신이 피의자 신분으로 출국이 금지된 사실을 알고 크게 좌절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그는 사망 전 "내가 한 편의 드라마를 찍는 것 같다"며 비통한 심경을 호소했다고 한 지인은 전했다. MBC 3년 선배인 김승수 서울예술대 교수는 "고인은 최고·최선의 작품이 아니면 만들지 않겠다는 마이스터 정신으로 똘똘 뭉친 연출가였고, 그런 열정이 현실의 벽에 부딪혀 좌절한 것"이라고 애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