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권상 前 KBS 사장 별세]

수십년 정치권서 손짓… 다 뿌리쳐
방송 통한 南北 문화 교류에 힘써… 기자 단체 관훈클럽 창립 주역

"1960년대부터 시작해 김영삼·김대중 대통령 시절까지 정치권에서 영입 시도가 많았지만 거들떠보지 않았죠. 평생 글 쓰는 기자임을 자랑스러워했어요."

박권상(85) 전(前) KBS 사장이 4일 오전 별세했다. 주변 사람들은 그를 "남에게 조언하기보다 시비 가리기를 더 좋아했던 사람"이라고 회고했다. 옳고 그른 것은 가려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었다. 동아일보 후배이자 11·15대 국회의원인 김진배 전 농수산물공사 사장은 "김대중 전 대통령과 일 년에 몇 번 인사차 만나 덕담을 주고받는 자리에서도 곧잘 누가 옳고 그른지 입씨름이 벌어져 주위를 조마조마하게 했다"고 말했다. 박 전 사장은 1952년 서울대 영문학과를 졸업, 합동통신에서 기자 생활을 시작했다. 주로 정치부에서 일했다. 1960년 4·19 이후 한국일보 논설위원을 거쳐 동아일보로 옮겨 편집국장·영국 특파원·논설주간을 지냈다. 영국 특파원 경험은 훗날 그가 KBS 사장이 되었을 때 BBC를 모델로 삼는 계기가 됐다.

언론인으로서의 생활은 평탄치 못했다. 1980년 신군부가 집권하면서 동아일보에서 물러나야 했다. 해직 후 1986년까지 1~2년씩 미국·영국 외무성의 도움으로 '대학 연구원'을 전전하며 해외를 떠돌았다. 그 시절 미국 우드로윌슨국제학자센터, 캘리포니아 동아시아연구소, 조지워싱턴대 중소연구소, 영국 옥스퍼드대 세인트안토니스칼리지 등에 머물렀다. 하지만 해외 시절의 공부가 훗날 왕성한 글쓰기의 바탕도 되었다. 실제로 1987년 귀국 후 2년 정도 자유기고가로 활동했다. 1989년에는 잡지 붐과 함께 시사저널 창간 멤버로 합류해 편집인 겸 주필로 펜을 잡았으며, 1994년에는 친정인 동아일보로 돌아가 4년 동안 고문을 맡는다.

고인은 1998년 김대중 정부 출범에 앞서 한시조직인 정부조직개편 심의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공무원 정년 축소와 정원 감축, 중앙인사위원회 설치 등을 주도했다. 이때 정부조직 개편이 여야의 정쟁 대상이 되는 것에 대해서도 쓴소리를 마다하지 않았다.

1998년 KBS 사장에 부임해 2003년 노무현 정부 출범 전까지 5년 동안 이끌었다. 그 시절 KBS는 경영에서나 영향력에서나 최고의 시기를 구가했다. 진홍순 전 KBS 특임본부장은 "무엇보다 언론의 독립성 확보를 위해 노력했다"며 "KBS교향악단의 평양 공연을 추진하는 등 방송을 통한 남북 교류에도 힘썼고, 개그콘서트 등 인기 프로그램도 많아지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일부에선 "기계적 중립에 치중한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는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KBS 이임사에선 "당파적·독선적이거나 선전·선동적 동기에서 세상사를 보도하고 인신공격과 허위 사실 유포 등 대자보식 언론이 홍수를 이루고 있다. 하지만 국민 모두를 주주로 모시는 KBS는 그럴 수 없다"는 소신을 피력했다.

고인은 1950년대 국내에 변변한 기자단체 하나 없던 시절 관훈클럽 창립을 주도했다. 저서로는 '자유언론의 명제' '영국을 생각한다' '대권이 없는 나라' 등이 있다. 중앙문화언론상, 인촌문화상을 받았다. 유족은 부인 최규엽씨와 아들 일평(미국 카든사 부사장), 딸 소희(미국 밴더빌트대 교수·뇌과학)·소원(영국 옥스퍼드대 강사·영문학)·소라(호주국립대 교수·언론학)의 1남 3녀. 빈소 서울성모병원 장례식장, 발인은 7일 오전 10시. (02)2258-59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