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O가 말하는 내 인생의 ○○○] 존 리 메리츠자산운용 대표의 '항상 낯섦'

초등학교 1학년 때 홀로 서울로… 스스로 살아가는 방법을 배워
더 큰 세상과 마주하려고 渡美… 대형 회계법인·자산운용사 거쳐
"월街서 배웠던 지혜·투자철학 한국에 뿌리내리게 하는 게 꿈"

최근 신도로 등록한 교회의 목사님 설교 주제가 '항상 낯섦'이었는데, 말씀을 들으면서 줄곧 마음이 뭉클했다. 내가 그간 살아온 인생을 요약하면 '낯섦'과 정면으로 마주하고, 그것을 극복하는 과정을 즐기는 여정이 아니었나 싶다. 새로운 낯섦을 향한 여정은 나를 성장시킨 원동력이다. 오늘도 이 여정은 현재진행형이며 지금 나이에도 새 행로를 찾게 된 것에 감사하고 있다.

나의 첫 낯섦은 초등학교 1학년 때였다. 교육열이 유난하셨던 어머니는 사람은 서울에서 배워야 한다는 일념으로 나를 홀로 서울로 올려 보내셨다. 당시 우리 집은 지방이 아니라 서울에서 멀지 않은 인천이었던 데다가 내가 워낙 어린 나이였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말렸지만, 어머니는 뜻을 굽히지 않으셨다. 부모님 밑에서 어리광 부릴 나이에 나는 낯선 서울에서 스스로 살아가는 법을 배웠다.

어머니께서는 항상 최고를 고집하셨다. 다른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은 당신의 아들도 할 수 있다고 굳게 믿는 분이셨다. 포기를 용납하지 않으셨다. 그러셨던 어머니께서 올해 96세로 하늘나라에 가셨다. 지금도 어머니만 생각하면 울컥하고, 그 강인함에 한없이 존경하고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된다.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무엇엔가 도전해야 한다는 것은 어릴 때부터 어머니께서 일깨워 주신 소중한 가르침이었다.

대학교 2학년을 마치고 중대한 고비가 찾아왔다. 장래에 대한 심각한 고민이 생긴 것이다. 당시는 졸업만 하면 취직은 전혀 걱정하지 않아도 될 시기였지만, 평범한 월급쟁이가 되어 남들과 똑같은 삶을 산다는 것이 내키지 않았다. 무언가 새로운 일을 하고 싶었다. 그래서 자퇴서를 내고 미국으로 가기로 결정했다. 더 큰 세상에서 다양한 경험을 쌓고 싶었기 때문이다.

미국 생활이 나의 두 번째 낯섦이다. 미국 생활은 혹독했다. 아무 준비도 없이 무모하게 자퇴서를 냈던 게 후회도 됐지만, 새로운 세계의 낯섦이 나를 흥분시켰고, 그것에 도전하고 있다는 사실이 위로를 주었다. 미국 대학에서 처음으로 공부다운 공부를 했던 것 같다. 결국 언어의 어려움에도 영어 과목을 제외하고는 모두 우수한 성적을 받았다.

대학을 졸업하고 대형 회계 법인인 피트 마윅 미첼(Peat Marwick Mitchell)에 취직했다. 피트 마윅 미첼은 KPMG의 전신으로, 당시 회계사 5만 명을 거느린 세계에서 가장 큰 회계 법인이었다. 거대한 조직이지만 소속 회계사들 간에 치열한 경쟁을 유도하면서 많은 회계사를 효율적으로 관리하는 놀라운 회사다. 업무량도 살인적이어서, 신입 직원 중 약 80%가 3년 안에 해고당하거나 퇴사했다. 미국이 경쟁력을 유지하는 비결을 엿볼 기회였다. 여기서 엄청난 업무량을 효율적으로 소화하는 능력을 배웠고, 회계사에게 꼭 필요한 꼼꼼함도 배웠다. 7년 동안 이 회사에서 열심히 일했다. 하지만 나는 또 다른 낯섦이 필요했다.

세 번째 낯섦은 스커더 스티븐스 앤드 클라크(Scudder Stevens and Clark)라는 회사와 만난 일이었다. 스커더는 세계 최초 자산운용사이며 미국의 자산운용사 중 매우 존경받는 회사의 하나다. 이 회사는 미국 회사임에도 무척 독특한 문화를 가지고 있다. 직원을 뽑을 때 엄격한 시험을 거치고, 직원들이 한번 들어오면 나가지 않는 문화다. 30년, 40년을 일하고 스커더에서 은퇴하는 것이 흔한 일이었다. 스커더는 마침 내가 일하던 피트 마윅과 같은 건물에 있었다. 스커더의 명성을 많이 들은 바 있어서 한번 도전해 보고 싶은 욕심이 들었다. 특히 회계사에서 펀드매니저로 변신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라는 주위 사람들 말에 오기가 더 생겼다.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나도 할 수 있다는 어머니의 말씀도 용기를 주었다. 어렵게 잡은 인터뷰와 시험을 치르고 바로 다음 날 스커더로부터 연락이 왔다. 회사가 나에 대해 관심이 많다고 했다. 인사부 책임자 말로는 순발력 테스트 결과가 무척 흥미롭다는 것이다. 스커더 역사상 규정 시간 안에 다 푼 사람도 처음이었고 전부 다 정답이었다는 말이었다. 그 때문에 회사에서 내가 화제가 됐다고 한다. 이후 인터뷰 과정은 순조로웠다.

스커더는 과연 놀라운 회사였다. 설립 배경부터 운용하는 방식까지 분명한 철학이 있었고, 항상 토론을 즐기며 반대 의견에 열려 있었다. 이 회사를 만난 것은 큰 행운이었다. 나는 코리아펀드를 맡게 됐고 주위의 훌륭한 펀드매니저들 지혜를 흡수할 수 있었다. 내 투자 방식의 근간이 되는 장기 투자 철학을 배운 것도 이곳에서였다. 당시 스커더 사장이 자주 하던 말이 생각난다. 아무리 어려운 결정이라도 고객 입장에서 생각하면 쉬워진다는 것인데, 내가 일생 간직하고 있는 말이다. 스커더에서 일하면서 20년간 전 세계를 다니며 코리아펀드와 한국을 소개한 것은 무척이나 행복하고 보람찬 일이었다.

다시 네 번째 낯섦. 지금 내가 몸담고 있는 메리츠자산운용이다. 젊은 패기만을 믿고 무작정 한국을 떠난 지 35년, 이제 조국에서 새로운 설렘이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나의 설렘은 메리츠에 그치지 않는다. 스커더에서 배웠던 지혜와 투자 철학을 한국에 뿌리내리고 싶은 것이 진짜 설렘이다. 또 다른 낯섦과 설렘을 아직도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을 보면 분명 나는 복 받은 인생이 아닐까. 그것도 나의 조국인 대한민국에서 말이다.


[존 리 메리츠자산운용 대표는]

존 리(56·한국명 이정복) 메리츠자산운용 대표는 27년간 미국 월가(街)에서 일하다 지난해 돌아온 '연어형' 금융인이다. 연세대 경제학과를 다니다가 돌연 도미(渡美), 뉴욕대에서 회계학을 전공하고 피트 마윅 미첼(현 KPMG), 스커더 인베스트먼트, 도이치자산운용, 라자드자산운용 등을 거쳤다.

월가에 있을 때, 해외 투자자 중 한국 기업 분석에 가장 탁월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1980년대 스커더 인베스트먼트가 월가 최초로 한국 기업에 투자하려고 만든 '코리아펀드'를 10년 이상 운용했고, 2006년 고려대 장하성 교수와 손잡고 한국기업지배구조펀드(일명 장하성펀드)를 만들기도 했다. 기업 지배 구조가 나쁜 회사엔 절대 투자하지 않고, 철저한 기업 분석을 통해 장기 투자하는 철학을 고수하고 있다. 그가 운용 중인 '메리츠 코리아 펀드'는 올 들어 수익률 15%를 올리며 국내 주식형 펀드 중 최상위권을 달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