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광이 열광하는 번역가… 이번엔 뮤지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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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0.09.15 23:51

'데드풀' '스파이더맨' 등 번역한 황석희, 뮤지컬 '썸씽로튼' 도전

번역은 대개 원작에 가려 잘 빛나지 않는 일. 하지만 요즘 가장 뜨거운 번역가 황석희(42)는 다르다. 수퍼 영웅물 '데드풀'의 현란한 19금(禁) 대사들로 '초월 번역에 상 줘야 한다'는 컬트적 반응을 얻었고, '스파이더맨 홈커밍'의 "스파이디, 찌리릿(tingle)" 번역을 거치며 영화 좀 본다 하는 사람은 모두 그의 이름을 안다.

스타 번역가 황석희가 공연 소품인 주인공의 모자를 쓰고 포스터 패널을 손에 든 채 웃고 있다. 그는 "연출가, 음악감독, 배우들이 모두 함께했다. 혼자 했던 영화 자막보다 훨씬 재미있다고 자신한다"고 했다. /김지호 기자
예술영화부터 블록버스터까지 선명한 '황석희 색깔'을 입혀온 그가 이번엔 라이브 뮤지컬 번역에 뛰어들었다. 서울 충무아트센터 대극장에서 공연 중인 뮤지컬 '썸씽로튼'이 그의 첫 번역 작품. 르네상스기 영국에서 당대의 '아이돌' 셰익스피어를 흥행으로 이기려고 극단 대표와 엉터리 예언가가 '뮤지컬'이라는 미래의 인기극에 도전하는 이야기다. 셰익스피어 소네트와 희곡 대사가 좌충우돌 패러디되고, '캣츠' '오페라의 유령' '라이온 킹' '서편제' 등 동서고금 뮤지컬 30여 편이 종횡무진 인용되는 "셰익스피어 사후 400여 년 만에 가장 웃긴 뮤지컬"(타임아웃 뉴욕)이다.

"제작자 분이 직접 연락을 주셨어요. 제가 번역한 '보헤미안 랩소디'를 보니 수십 번 들은 노래 가사가 새롭게 들렸고 '데드풀'을 보니 언어유희에도 감이 좋다며, 가사 번역과 언어유희 둘 다 되는 당신이 꼭 해달라고. 덜컥 '하겠습니다' 해버렸네요."

뮤지컬 '썸씽로튼'의 도입부, 당대 최고의 스타 작가 셰익스피어의 등장에 감탄하는 군중의 모습. /엠씨어터
영화 300여 편, 다큐 400여 편, 미드 3000여 편을 번역했지만 라이브 뮤지컬은 전혀 다른 도전이었다. 황석희는 수퍼 영웅 영화를 맡아도 원작 코믹스의 세계관을 마스터하고야 마는 학구파. 그렇다면 '썸씽로튼'을 위해 르네상스 역사와 셰익스피어를 공부했을까. 그가 '후~' 하고 한숨을 쉬더니 웃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죠. 셰익스피어는 전자책으로 대부분 갖고 있는데, 패러디 대사를 만나면 검색 기능으로 원 작품과 그 속의 맥락을 찾아갔어요. 해외 공연 커뮤니티의 관객 글에서도 큰 도움을 받았고요. 셰익스피어 원작이 멋있어서 놀라다가, '관객이 패러디인 것까지 알게 하려면 어떻게 옮겨야 하나' 머리를 쥐어짰죠." 영시(英詩)의 두운·각운을 살리기란 그야말로 '미션 임파서블'. 그는 "뜻과 운율을 동시에 잡는 건 불가능에 가깝지만, 운이 좋아 번뜩 좋은 표현이 떠오를 땐 퍼즐을 푼 것처럼 신나더라"고 했다. '사람, 시상(詩想), 세상'처럼 'ㅅ' 두운이 이어지는 가사, '간장공장 공장장'까지 등장하는 운율의 향연이 난산 끝에 태어났다. "제 번역의 궁극적 목표는 우리말로 자동 음성 지원되는 '입말'로 옮기는 거예요. 이번에도 최선을 다했고요."

아이패드 악보 위에 음표 하나하나 맞춰 가사를 썼다. 연출가와 음악감독이 패러디된 뮤지컬들을 함께 찾아주며 도왔다. 계속 상의하며 고치고, 배우들이 발성해본 뒤 다시 다듬었다. "집에서도 종일 이 뮤지컬 음악만 틀어 놓고 영어로 우리말로 따라 부르니 아내가 한번은 '제발 좀 다른 거 틀어라'고 불평하더라고요, 하하!" 황석희는 "연출가와 배우들이 숨을 불어넣으면 제가 번역한 가사와 대사가 무대 위에서 살아 움직였다. 새로운 세상이 창조되는 기적을 보는 것 같았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그의 명함 뒷면에는 '세상을 번역하다'라고 쓰여 있다. "마블 영화 인물이 썸씽로튼 속 사람을 만날 리는 없잖아요. 영화나 공연은 각각이 하나의 우주, 세상 같아요. 저는 그 세상 하나하나를 저만의 시선으로 번역하는 사람이라 생각해요."

완성된 작품을 보면 늘 창피하지만, '번역은 실패의 예술'이라고 한 움베르토 에코의 말을 의지해 계속 앞으로 나아간다. 공연 번역, 또 하고 싶을까. "실은 지금 작업 중인 작품도 있고, 추가로 의뢰 들어온 작품이 두 편 더 있어요. 한번 해봤으니 더 유연하게,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영화 번역가'라고 적힌 그의 명함에 곧 '공연 번역가'라는 문구도 찍히게 될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