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년前 이건희 "반도체 다음 돈버는건 제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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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0.11.17 02:00

1993~1996년 '신경영' 지휘 당시 육성 테이프… 월간조선 단독 입수

"의료 산업은 21세기에 꽃이 필 거야. 생산으로 돈을 버는 건 메모리(반도체)가 마지막일 거야. 미래를 보지 않고는 크게 돈 벌 수 있는 게 없어. 특히 길게 보고 준비해야 할 건 제약 산업이지. 일단 해외 특허부터 확보하고, 세계적 제약 회사 하나 사는 것도 생각해 봐."

고(故) 이건희 삼성전자 전 회장이 지난 1993년 미국 경제지 포천과 인터뷰하는 모습. 이 전 회장이 1993년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삼성전자 임원들을 소집해“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꾸라”는 신경영 선언을 한 뒤 삼성전자는 품질 경영, 디자인 경영 등으로 대도약을 이뤘다. /삼성그룹
지난 1995년 고(故) 이건희 삼성전자 전 회장의 지시다. 삼성의 바이오산업 진출과 성공의 바탕에는 이 전 회장의 25년 전 구상이 있었던 것이다. 이 전 회장이 1993~1996년 3년간 업무 지시한 내용이 담긴 육성이 공개됐다. 월간조선은 현명관 전 삼성 비서실장이 보관하던 이 전 회장의 육성 녹음테이프 30개(약 17시간 분량)를 입수해 17일 발간하는 12월호에 보도한다. 녹음테이프에는 이 전 회장이 1993년 '신경영'을 선언한 이후 임직원에게 강조한 경영 철학과 그 실천 전략, 한국 경제 전반에 대한 고민과 우려 등이 포함돼 있다.

◇"생산으로 돈 버는 건 반도체가 마지막"

이 전 회장의 육성 녹음테이프가 존재하는 건 그의 당부 때문이다. 이 전 회장은 "그룹의 목표와 회장의 경영 철학을 실천하는 사람은 임원과 일반 직원들인데, 회장에서 비서실-사장-임원-직원으로 전달되는 동안 뜻이 왜곡돼서는 곤란하다"며 "내 얘기와 지시, 회의 내용을 그대로 녹음해서 직원들 앞에서 틀어주라"고 지시했다.

그는 늘 위기의식을 강조했다. "내가 더 걱정하는 건 다음 세대야. 1997~1998년이 되면 기본 경쟁력이 안 돼서 진짜 불경기가 오게 돼." "지금 반도체가 잘되고 이익이 몇 조원이 나고 하니까 다들 내가 기분 좋아하고 들떠 있는 걸로 생각하고 있겠지. 하지만 나는 더 불안해." 이를 두고 삼성 안팎에선 이 전 회장이 직감적으로 곧 위기가 닥칠 것임을 예견했다고 보고 있다. 삼성은 이 전 회장의 지시로 일찌감치 위기를 대비했고, 어떤 기업보다 IMF 외환 위기를 신속하게 극복했다. 위기를 기회로 바꾼 것이다.

녹음테이프에는 제약 산업을 비롯한 미래 신산업에 대한 이 전 회장의 고민이 담겨 있다. 그는 "철강·반도체·자동차·전자 같은 투자 집약적인 대형 산업과 인프라를 지금 다 해놓지 않으면 후대에서 원망을 들을 수도 있어"라며 "지금 제1, 제2 이동통신 나오는데 앞으로 제4, 제5 이동통신 시대로 갈 거야"라고 말했다. 실제 삼성은 AI(인공지능)·5G(5세대 이동통신)·바이오·전장(電裝) 등을 '4대 미래 사업'으로 꼽아 대규모 투자를 하고 있다.

이 전 회장이 격분했던 순간도 생생하게 담겨 있다. "사람을 다치게 하고 사회 혼란을 가져오는 업종은 포기할 거야." 1994년 삼성중공업 직원들이 한국중공업 현장에서 주요 부품을 촬영하다 발각되는 사건이 발생하자 이 전 회장이 한 말이다.

◇"관리고 정치인이고 문제야"

학력·성별과 관계없이 누구나 능력이 있으면 대우하는 능력주의를 삼성에 자리 잡게 한 이 전 회장의 인사 원칙도 엿볼 수 있다. 이 전 회장은 "고졸 중 실력 있는 이는 정직하게 올려주자고. 과장이든 부장이든 이사든 달아줄 수 있어야 돼"라고 말했다. 고졸 출신으로 삼성전자 임원이 됐던 양향자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이 전 회장 빈소를 찾아 "(이 전 회장이) 늘 보잘것없고 배움이 짧은 저에게 '거지 근성으로 살지 말고 주인으로 살아라'라고 말씀하셨다"고 회고했다.

이런 말도 남겼다. "사람이 제일 중요해. 절대로 파벌 만들면 안 돼. 하나회 같은 거 보라고. 사람은 주기가 있어서 잘될 때가 있고 안 될 때가 있는 거야. 실수하면 바로 바꿔버리고 그러면 사람이 클 수가 있나. 인간이 일 년에 석 달 꽃피지 못해."

이 전 회장은 삼성이 단순한 일터가 아닌 임직원의 보금자리가 돼야 한다고 생각했다. "임직원 의식주, 건강, 자식 교육 이런 걸 회사의 영역으로 갖고 와야 돼. 희망이 있어야 되고 자식이 잘 자라줘야 되고 부모가 편안해야 되지. 노인과 아이들을 중요시하지 않는 나라는 망하게 돼 있어. 젊은 사람들이 전부 도망가 버린다고. 내가 사업이나 공장을 할 때마다 노인정, 탁아소 만들라는 게 그 얘기야."

녹음테이프에는 그가 정치권을 향한 불만을 토로하는 대목도 들어 있다. "대한민국에 나라 걱정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어? 다 자기 잘살 생각뿐이지. 관리고 정치인이고 문제야."